
닭 똑바른 딸 지금의 9월동에 닭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옛날 인천동방부가 있던 문학동에서 서울로 갔던 길로 여관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언제나 나그네들이 끓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막을 내고 있던 맹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하고 힘이 강하고, 몸집이 거대하고 모두 맹장군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표에서는 주막주인 행동을 했지만 실제로는 도둑이 그 본업이었다. 자신의 집에 묵어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여 훔쳐왔다. 그는 손님 안에 돈이나 가격이 나오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떠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와 그 길에서 기다렸다가 모두 빼앗았다. 스윙 속에 돈을 갖고 있거나 귀중한 물품을 가졌다는 걸 깨달아서 침착하지 않고 빼앗겨야 했다. 따라서 그의 주막 경영은 돈이 있는 사람과 귀중한 물품을 가진 사람을 선별하기 위한 방안으로 하는 위장술이었다. 그런데 이 맹장군은 나그네의 돈이나 귀중한 물품을 빼앗는 방법이 정말 절묘했다. 그는 매일 밤 자정을 지나면 밖으로 나와 양손바닥으로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려 닭의 외침을 냈다. 숙박하고 있는 손님에게 새벽이 된 것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다. 다르게, 가짜 닭소는 소리를 진짜 닭 소리라고만 알고 잠들었던 손님들은 소스와 일어나 길을 떠났다. 손님은 일반적으로 이른 아침부터 길을 떠난다. 이렇게 손님이 귀찮은 길을 떠나는 처비를 서두르자 맹장군은 먼저 집을 나와 도중에 그들을 기다렸다가 돈과 물품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도둑을 동경한 데다 맹장군이 너무 장사했고, 손님은 맞는 재능이 없었다. 어쩌면 손님 속으로 끌어내지 않도록 반항하면 맹장군은 그 무리한 힘으로 때려 죽일 때까지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면 이런 소문이 퍼져 마침내 관가에 들어갔다. 그러나 관가에서도 맹장군의 소행이 고약했지만 굳이 손을 쓸 수 없었다. 너무 흉악한 맹장군이기 때문에 어떤 후한이 생길지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 맹목에는 훌륭하고 현명한 아내가 있었다. 이 아내는 장인의 맹장군이 할 수 없었던 행위를 마을사람으로부터 전하고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혀 얼굴을 들고밖에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아내는 어떻게 하면 시아버지의 나쁜 행위를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아내의 머리 속에는 하나가 떠올랐다. 장인의 비결을 건드리지 않고 손님이 닭 소리에 속지 않도록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맹장군은 평소처럼 자정에 다시 닭의 외침을 흉내냈다. 그러자 의외로 그의 아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치킨치킨 우지말라, 맹장군의 닭이다" 잠이 깨어난 길을 떠나려던 손님들도 이 목소리를 듣자 맹장군의 의문스러운 소행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후에는 그래도 게으른 맹장군도 지금까지의 자기 행동을 깊이 긁어 훔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관가에까지 알려져 있어, 그 아내에게는 후반의 상이 내려졌다. 그런데 가슴은 아내의 아버지의 이름인 5대에서 찍은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맹장군의 주막은 일제 시대까지 있었지만 마을이 개발되어 9월 초등학교가 들어가 사라졌다. 이 닭이 이야기는 아직 인근 마을 주민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장사 박창보 구한말 고종시다. 만수동에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았다. 그는 원래 포수였지만 강력한 장사였고 담도 컸다. 그런데 그때 강석동 일대에는 소문의 무서운 도적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관가에서도 이 도적을 잡아도 감히 처형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 도적의 조르게들이 보복을 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도둑을 체포하고 목을 베기로 결정했지만, 관가에서는 고환이 두려워 굳이 손을 쓸 수 없고, 벌을 떨게 하고 있었다. 이 소문을 전한 박창보가 장사인 데다가 자발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관가에서는 지금까지 기쁘고 고맙지 않다. 이렇게 박창보는 마침내 그 도둑 괴수의 목을 자른다. 하지만 괴수가 처형당했더니 다르거나 그 밤에 도둑의 조르게들이 무리를 짓고 박창보네 집에 몰려들어왔다. 일이 이렇게 되면 박찬보네 집 사람들은 간이콩알만 되어 오돌올 떨고 있었다. 지금 영락 없이 도둑의 조르게들에게 죽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박창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실로 놀라운 용감한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아내의 옷을 입고 여성에게 변장을 했다. 그리고 철 깎기를 가지고 도둑의 조르게들을 덮치도록 멈췄다. 장사의 쓸데없는 힘으로 치는 철 참깨를 치고 어느 것이 견딜까! 삽 시간에 몇 명이 땅에 쓰러졌다. 놀란 도둑들은, 에이, 이 녀석의 집은, 그녀의 4명까지 동삼을 끓인 것인가 모두 장사구나. 그대로 싸운 것은 뼈도 못 박을 것이다는 것을 이렇게 부끄럽게 생명을 보존한 녀석들은 지레 공포를 먹고 도망쳐 버렸다. 이 전투에 참깨를 맞아 죽어 활기찬 도둑이 열명도 늘었다. 이런 편을 당했더니 도둑들도 무서워 그 후 다시 공격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임오 군란의 때다. 일본인 하나부사가 문학동에서 피난을 했을 때였다. 그때 장자골(장수동)에 살았던 최춘택이라는 사람이 왜병들의 세운 총을 15봉이나 빼앗아 하나의 아름다움에 포옹이 개천에 빠져버린 적이 있었다. 분노로 가득한 왜병들이 이것을 가서 최춘택을 쫓았다. 그리고 딱딱한 기와트장을 차고 왜병들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이 날아오르지 않은 낙뢰를 맞으면 왜병들은 기쁨을 하고는 더 이상 최춘택을 추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줄다리기 김상봉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다양한 놀이가 시대마다 번성한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이전 놀이에는 줄다리기, 공수기, 지재주, 실무, 가면춤, 사자춤 등 다양한 행사와 놀이를 즐겼다. 약 200년 전에는 인천 전재리에 열을 잘 타는 재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김가라는 사람의 줄다리기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높였다. 헌종 때 궁중의 한 경사로 전국에서 재인을 뽑아 각각의 묘기를 두드렸다. 이 가운데 김가가 가장 늘어서자 헌종은 그의 기술을 칭찬해 두두라는 의미의 재회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김상봉은 근세강 건너의 중시 저격이다. 그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 최가라는 사람은 왕으로부터 우에가와라는 이름을 주었다. 카미카와는 줄다리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최상천은 한양의 김광포와 황주의 이풍운에 기술을 전수시켜 줄다리가 최근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김상봉 출신지인 인천 정재리라는 마을 이름도 김상봉이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줄다리기가 많아 정재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김상봉의 줄다리기 기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평지에 줄다리기를 한다. 13m 거리의 양측에 가위 사복을 약 7m 기둥의 양측에 세운다. 줄은 8부의 끈을 늘려 양말에 단단히 조여 진동이 조금도 없어진다. 줄을 탈 때에는 부채를 들고 제대로 줄을 서서 줄로 올라가는 데 가지고 있는 재담을 부딪쳐 줄을 탄다. 그의 스턴트는 43을 넘는다. 1. 앞으로 걷기 2. 뒤로 걷기 3. 전방으로 걷기 4. 뒤로 걷기 5. 일어나 6. 앉아 좌우로 돌아다니기 7. 닭 발 8. 닭 홰타고 좌우로 기쁨 1. 비 13. 이중 홍채비 14. 가세토물 무릎 황새 무릎 빈번한 기쁨 27. 책상 다리 28. 책상 연설 거품 29. 책상 빗질 트림 30. 책상 다리 31. 이전 쌍홍채 비 후 쌍홍채 비율 32. 루팡 43. 얼음의 피로 등 43종류의 묘기를 두드려 재담을 하고 열을 타는 것이다. 김상봉의 43개 무덤은 제자들 사이에서 오늘까지 전수되어 왔다.
장사 추도도 아키노베 섬은 조선 말단에 인천 조동면 연락 마을에서 평민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대대로 영의정을 맡은 김재로의 묘지 관리인이었다. 추도도는 당시 세도가인 청풍 김씨의 권세만을 믿고 돌아다니며 행패를 주창하고 인천부 관청에서는 큰 골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승의 묘지라서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추도도의 행패는 날이 지나면서 치열해져 피해자의 고발이 흘러넘치고, 인천 부사는 불가능하게 그를 잡아 불량죄라는 표시로 철을 붙이고 얼굴에 철도장을 찍어 냈다. 주장사는 흉포한 얼굴을 해도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직 행모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자리를 피했다. 관장사가 한양에 있을 때 별안의 혼란이 일어나서 모두 서둘러 피난을 숨기려고 했지만 성문이 굳게 닫혀서 나올 수 없었다. 그때 관장이 나타나자 사람들에게 성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주장사는 자물쇠를 맨손으로 비틀어 부수고 성문을 열어주고 모두를 안전하게 피난했다고 한다. 불량배라고 낙인이 찍힌 자장사도 위기를 모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했다고 했다. 창자골 하치조지 임진왜란 이후 한국은 피폐해, 관리자들이 수탈을 태워나라, 나라의 질서가 흐트러져, 백성들은 이탄에 빠져, 도둑이 날뛰었다. 백성은 도둑이 두려워서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없었다. 인천에도 예외없이 도둑이 끓었다. 인천의 나가코야는 도로를 따라 위치해 당시 인근에서 소문이 난 부호가 사는 마을로서 정평이 있었다. 장자골이 도로를 따라 가면 어느 날 밤에 수상한 장정들 몇 명이 주막을 찾아 술을 먹고는 떠나지 않았다. 주모가 그들의 눈치를 보니 도둑같고, 몰래 자신의 남편을 시켜서 이웃의 청년들에게 알렸다. 뉴스를 들은 이웃 팔장사는 도둑을 일망 타격하기로 결심했고 무기를 들고 도둑이 오는 길에 숨어 기다렸다. 한밤중이 되면 그 도둑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을 침입하고 그것을 덮치도록 비굴하기 시작했다. 이때 도둑에 몰두하고 있는 도둑들의 총과 무기를 뽑아 그들을 잡아 포도청에 넘겼다. 회사 또는 이에 후한상을 팔장사로 내렸다. 이후 팔장사가 두려워하며 장자골 근처에는 도둑들이 항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서는, 이 거리는 옛날부터 도둑이 되면 촌장정들이 나와 도둑을 잡고 마을 느티나무에 사지를 묶은 후, 손톱과 손톱을 뽑은 후 해방해 인근의 도둑은 굳이 무서워서 마을 근처도 어리석지 않았다고 마을.
무당 여자 옛날부터 충신, 타카코, 음녀는 명문 양반의 집 안에서만 나온다고 했지만, 인천에서는 천한 무당가게에서도 열녀가 나왔다. 경신리는 경신리의 잘못된 표기인데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무당을 칭한다. 이 경신리 무당촌에서 무녀가 나왔다. 옛날, 그 부인은 무려 이름을 날려 버리고, 돈을 벌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50대에 달해 병이 났는데 병을 고치려고 하얗게 약을 구하고 굿을 하고 정중하게 드렸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 병에는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부인은 자신의 허벅지 고기를 잘라 남편에게 주었다. 하늘이 감동했는지, 남편의 병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 또 다시 병이 격렬해져 그만두고 죽어 버렸다. 아내는 크게 불쌍하고 침식을 잃었다. 이 사실은 전 인천으로 퍼져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인천 유학자들은 철종에게 이 사실을 상소했다. 철종은 무당의 행위를 극구 칭찬해 열여문을 내렸다. 연결하는 여자 동굴동의 고봉산 아래 길 옆에는 인천에서 가장 크고 장대한 신도비가 서 있으며, 거기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산중턱에는 조선조 정조의 시공조, 형조판서를 보낸 조정만의 산소와 그 아들산소가 있다. 그 산소 비석의 전면에는 열녀 나주임 씨 정려비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열녀의 행위가 새겨져 있지만, 긴 바람을 지나 소멸해 읽을 수 없다. 조판서의 후손에게 뒷면의 내용을 물어보니 원래 조정만은 호걸로 여색을 탐하고 정실 부인이 두 명 있었지만, 그 밖에 소실을 안고 살고 노년에는 세토를 그만두고 집에 숨어 시문과 서예에 열중하면서도 7세가 됐다고 한다. 조판서는 임씨를 매우 좋아했고, 그가 임씨를 맞이한 지 8개월 만에 죽어버렸다. 이에 동배 임씨는 매우 애통하고, 시체 앞에 잠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한 뒤 며칠 후 일부 종사의 대의와 순정을 안고 스스로 자결하고 낡은 부군을 따랐다는 것이다. 조판서의 후손들은 빠듯한 열녀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그의 시체를 영감 옆에 묻어주고 열여우를 세웠다. 그 후 정조임금이 10세인 여성의 정서를 내렸다.
또 하나의 전설은 호그포는 오봉산의 기슭에 크고 검은 바위가 마치 큰 범이 입을 열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모양이기 때문에 호구암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호괌은 바다를 건너 대부를 주워 삼키도록 응시하고 있어 대부도에는 개가 번식할 수 없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개는 호랑이의 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도 사람들은 개를 사두자마자 죽어 버리기 때문에, 호구암을 심하게 싫어했다고 하고, 이 호구암은 일제시의 시오다를 만들 때에 매몰했다고 한다. 그 후, 대부에는 개가 잘 자란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를 잘 고증해보면 논현동의 서해안(옛 호구포대 앞에는 오하라 예도와 소원예도가 있었다)의 사가가리에서 시흥 안산과 대출도를 볼 수 있는지 마주하고 있다는 점은 지형상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설은, 어떤 특색 있는 물건이나 지형을 상상력을 동원, 미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그포는 마치 호랑이가 입처럼 깊게 패한 호그포 대남동지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르산 리혼 바르산리는 수산동의 옛 이름이다. 이 마을은 그 형태가 마치 주발과 같고, 발산리로 했다고 한다. 바르산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인데 명당이 많았다. 한양에 살던 홍씨가 조선 말단에 이 마을을 자주 출입해 명당을 발견하고 거기에 무덤을 쓰고 싶었지만 마을의 뒷산이기 때문에 몰래 산소를 만들 수 없었다. 홍씨는 묘안을 찾아 돈을 주고 남사를 마을에 끌어들였다. 홍씨는 이웃 사람들에게 낮에는 남사당 놀이를 구경해주고 그 틈을 이용해 산소를 사용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야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무료로 남사당 놀이를 구경했기 때문에, 그대로 묵인해 버렸다. 그 후 홍씨는 복이 내리는 것을 심하게 고생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홍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은 두 곳으로, 하나는 바르산 마을 뒤편의 산의 과수원의 뒤편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맞은편 홍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 있는 홍씨묘가 후대의 무덤인지, 몰래 이장한 무덤인지는, 비석이 너무 오래되어 도저히 모른다.
예전에는 한 장수가 돌을 파고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숨겨두고 뚜껑의 바위를 덮어 놓았다. 이상하게도, 이 바위를 만지자 그 자리에서 번개가 맞아 죽어 버렸다. 문학산 정상의 안관당을 지키고 있던 당지가 바위 속에 무엇이 들렸는지 보려고 망치로 부서졌는가. 그러자 아오카와 도력이 치고 괴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투경의 바위 아래가 떨어진 것은 토지가 깨진 모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위 중 하나에도 이야기를 만들어 소중히 하려고 했던 우리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이야기다. 자연을 무너뜨리면 그 피해가 우리에게 똑같이 돌아온다는 훌륭한 교훈이 담겨 있다.
사모지 머리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향하는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에 있는 고개가 사모지 고개이다. 쓰루야마 서원 부지에서 숨을 삼키고 머리에 도착하면 청량산이 다가오고 멀리 서해가 펼쳐지고 있다. 백제시대부터 은호로 가기 위해 사용했던 중요한 통로였다. 지금은 청학동으로 향하는 도로를 내려 문학산과 노적산의 사면토를 깎아 묻은 환악이 되었지만, 옛날은 좁고 세세한 목이었다고 하고, 거기에는 숨겨진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삼해주현 여자지도서에서는 그 머리를 삼해주현이라고 쓰고 있으며, 그 내력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삼해주현은 문학산 서부 기슭에 있는 목이었고 그 머리 위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의 수도꼭지에는 마치 동이처럼 생긴 구멍이 열려 있지만, 옛날에는 그 구멍에 미카이 술이 가득했다고 전한다. 그 목을 넘은 사람들은 목을 올리거나 숨을 내쉬며 목이 마르면 그 술을 띄워 목의 갈증을 풀었다. 그러나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잘 갈증을 치유할 수 있는 술이었기 때문에 욕심을 부르고 더 마시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욕심을 가지고 이를 지키지 않고 술을 한잔 이상 마시면 그만두고 술이 마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 머리를 삼해주현이라고 부르게 됐다. 삼호현 옛날,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갈 때, 한양에서 부평의 별리현(별리 고개 또는 비룡 고개)을 넘어, 이 목을 넘어 지금의 마쓰시마 옥영동에 있던 연하 거리로 진행해, 거기서 한널로부터 나를 타고 떠났다. 그때 사신을 배웅에 쫓겨난 가족들은 이리현에서 심각한 이별을 고했다. 중국까지는 멀리도 있었지만, 폭풍을 만나 불길한 것이 생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한편 사신들도 별리현을 떠나 이 미호현에 오르면 멀리 보이는 별리현에 그때까지 서 있던 가족을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이별의 애틋함을 나누었다고 한다. "모두 건강해진다" "지금까지 잘 간다" "다녀오자 건강해지자" 이렇게 이별을 아끼고 큰 소리로 별리현에 서 있는 가족을 항해 3회 노래해 이 머리를 넘었다. 그렇게 해서 이 목을 세 번 부르는 머리로 삼호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안관당과 관련된 전설 문학산봉 아래 돌로 벽을 쌓은 안관당이라는 사원이 있었다. 안관당은 임진왜란 때 지혜와 계략으로 왜군과 싸워 인천을 지킨 인천 부사 김민성의 혼령을 모시는 사당으로 인천 사람들의 진심이 담긴 곳이다. 인천 부사의 김민성은 임진왜란 때 여려 차례차례 왜적과 싸우는 1593년 병으로 순수했지만, 구국의 송명이었던 그는 죽어서 혼령이 되어도 문학산을 떠날 수 없었다. 병란이 있을 때마다 목마를 타고 창과 칼을 휘두르며 문학 노인들의 꿈에 크게 노린 김민성이 자주 나타나며 당시 인천 부사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김민성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가 순국한 문학산성 위에 사를 세워 김민선 내외의 목조상을 모셔 매년 제사를 했다고 한다. 안관당 이야기 김민성 인천 부사는 여러 번 왜군과 싸우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593년에 병을 잡고 멈추고 세상을 떠났다. 전쟁통에 세상을 떠올랐기 때문에 나라의 걱정으로 눈이나 제대로 감았다. 그래, 영혼이 되어도 문학산을 잊지 않았다. 큰 소란이 있을 때마다 목마를 타고 창문과 검을 휘두르면 문학산 주위를 돌며 사람들을 깨웠다. 마을 사람들은 김민성 부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문학산성 위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장을 보냈다. 제사 중에 마을에 도둑이 들어가면 다리가 담이 붙어 버려 잡혀 버렸는지. 그만큼 김민성 부사에 대한 신앙이 컸다. 서양문물이 들어와 우리 역사와 마찬가지로 안관당도 수수께끼를 당하게 된다. 사모지 고개를 넘어 지금 청학동 최씨의 문중에 한 아내가 있었다. 부인은 예수교를 믿었지만, 안관당에 모셔진 김민성 부사의 목조상을 우상이라고 조롱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나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어리석은 천치처럼 생긴 뒤 사람들만 보면 안관당 김민성 할아버지 목조상처럼 눈을 매달아 권총을 놓고 시이크 시이크라고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를 사악하네라고 부르자 저주받고 태어난 아이였다. 또, 가톨릭교를 연기하는 호반 박수수가 제사하는 것을 미신이라고 말하고 반대하면, 그 아들의 형제가 안관당을 날려버리고, 주변에 있는 고목 느티나무를 자르고 사당마저도 하루다가 벌을 받아 죽었는가.
옛날에는 나무가 오래되면 영혼이 머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낡은 나무를 신성하게 생각하고 마을의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무를 자르면 큰 꿀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후 마을에 재앙이 자주 일어난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10월 초 안관당 제사를 다시 맞아 마을 평안을 기도했다. 마지막 당주는 문학동에 사는 이윤경이라는 것이었다. 안관당은 사라졌지만 동제를 보낼 때 제사를 하기 전에 술을 만들어 종이에 넣고 짚으로 싸서 놓으면 밥이 빨리 익은 것인가. 지금은 문학산이 군사기지로 쓰이고 제사장은 중지되어 이웃 사람들도 들어갈 수 없다. 인천을 지켜준 훌륭한 김민성 부사를 기리는 마을 축제는 중요한 행사였지만 정말 유감이다.
이 법칙은 인천 화평리인이다. 평색의 관직에 있으면서 깨끗한 청백리에서 살아 정숙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말년에 화평동에 내려와 살고 죽기 때문에 인천 화도의 후산 매혈 명당에 무덤을 세웠다. 쥐산에 위치한 이묘는 맞은편에 만석동의 괭이(고양이산)가 서로 마주보고 있어 명당석이라고 한다. 후손인 이괄이 계란을 일으켜 일족이 화났다. 그때 이 법칙의 산소까지 파내겠다는 왕명이 내려가 이 법칙의 산소를 찾아냈지만 안개가 분명히 찾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개항이 되어 이 법칙의 산소가 연결되는 쥐와 괭이 사이의 바다를 막고 매립을 하여 산소를 석남동으로 옮겼다. 이칙 조선조 문신, 자는 숙도, 본관은 고성. 왼쪽 의정원의 손자. 서윤질의 아들. 1456년 세조 2년 진사가 되어 1462년 식년 문과에 급제. 장훈고 직장에 이어 병조좌원을 거쳐 이조정승 등을 보내 사인, 집 등을 역임했다. 성종의 시작에 대사성이 되어 교학진흥에 힘쓰고 그 후 관찰사에게 전임하자 유생들이 그의 초청을 상소했다. 이어 동부승지, 이조두판, 대사헌 등을 걸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통하고, 덕망, 선견, 전억으로 당대에 유명했다.
만취당은 조선 신대 유학자 이숙이 송림동 매화지에 세운 정자다. 이숙은 김창생, 이유곡 등과 사귀며 학문을 발전시키고 더욱 발전시켰다. 그들의 뛰어난 작품집인 만취당암이 여기서 집대성되었다고 한다. 이취당의 이주선 색은 청백리였고 무고한 도난자로 이천유학계의 거물이었다.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인천에 남긴 공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지금은 수도 국산인 송림동 뒷산의 엣지명은 만수산, 관수산이었다. 그 우유는 맨스 산기슭에 살던 무녀가 날마다 맨스를 큰소리로 외쳤다. 어떤 사람은 미녀가 외쳤던 만수는 여기에 인천 수원지가 들어갈 것을 예언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금으로 걸은 벼, 콩, 잡곡을 창고에 보관하고 필요에 따라 한양으로 옮겼다. 배를 통해 운반된 세곡은 서해안을 통해 인천을 지나 강화, 김포를 걸고 한강에 올라 용산에 쌓였다. 인천지방 농민이 납부하는 세곡은 용산창고로 옮겨졌지만 만일 기일을 지키지 않으면 골사토가 문책을 받았다. 먼 거리에 있는 골룰에서는, 미리 3곡을 옮겨 쌓아 놓았다. 만석동, 영종, 경기동 등에 쌓아 놓았지만, 특히 만석동의 포구에는 가장 많이 3곡을 쌓아 놓았다고 한다. 해에 만석을 쌓아두면 만석동이 되었다고 한다.
구리 안방 고려시대 인천 무에 부자가 살았지만, 그 집에서는 매일 떡을 하고 있기 때문에, 떡 속을 통나무로 만들면 잠시 가서 부서지기 때문에 영구히 사용하려고 구리 속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구리안반은 귀중한 재물로 그 집에서 매우 소중히 여겨졌지만 의외로 사변이 일어나서 서둘러 피난을 하고 이 구리안반을 집 연못에 묻어 떠났다. 소란이 끝난 뒤 가족이 집으로 돌아와 연못 속에 매장한 동그릇을 방문했지만 갔던 곳이 없었다. 나중에 몇몇 사람들이 금속 탐지기를 동원 그 일대를 후퇴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동안반이 매장된 연못은 지금은 매립되어 작은 목재소가 그 자리에 들어 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그 내용이 그곳에 아직 묻혀 있다고 주장할까 하면 다른 사람은 그때 도난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실의 유래 드림돈에는 마을 이름이 여무실이라는 곳이 있다. 이 여자무실이라는 이름은 여성이 춤추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옛날 이 마을에 큰 집을 지어 처녀를 뽑아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 또는 무당을 양성했다고 하거나, 무당이 굿에서 춤추는 집이었다고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인천에는 여자가 붙은 마을이 두 개 있지만, 하나는 여무실이고, 다른 하나는 연희동(연희동)이다. 영희동은 원래 여조동에서 신라 시대에 처녀를 빼고 짜기를 가르친 곳이다. 조선시대 때 여자와 부채는 불길하고 천이라며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다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여무실이라는 이름이 이실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산혈 논현동과 고장동은 인근 마을에서 두 마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여기에는 드림동에서 출발하여 논현동을 타고 고장동까지 내려온 오봉산 줄기가 있다. 옛부터 전해져 온 곳에 따르면 논현동에 있는 오봉산 산혈을 깨면 고장동의 부녀가 놀겠다는 이야기가 있고, 고장동 주민들은 혹시 논현동에서 오봉산 산혈을 파내지 않을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며 논현동은 나왔다. 산혈의 위치에서 논현동과 고잔동의 경계 부근의 언덕이라고도 불리며, 현재 고잔동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 이야기의 소재가 고봉산 줄기의 산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현 솔레철교 맞은편 시흥시에 산이 하나 보인다.
향기로운 이시이 만월산의 동쪽에는 고려건국 당시 왕명으로 건립했다는 개국사가 있었고, 서쪽에는 조선 최초로 건립되어 조선조말에 폐절된 주안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리고 보름달 산의 서쪽 기슭에 향기가 좋은 이시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시이를 마시면 약수가 되어 안질, 끓는 등에 바르면 깨끗하게 나왔다고 해서 여러 곳에서 주안산의 이시이를 찾았다고 한다. 또,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세종 26년(1444년)의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물의 맛, 향기, 약효 등을 세세하게 조사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을인의 말에 따르면 다음 3곳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약사의 동쪽에 석마라는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는 향기가 많고, 마을 위쪽에 이시이가 있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와서 물을 키워 먹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추측되는 곳은 약사관 내 위쪽에 이시이가 두 개 있었지만, 이것은 약사가 할 수 있기 전부터 있었고, 한쪽은 음수, 다른 쪽은 양수라고 불렀지만, 현재 음수는 대웅전 건축시 없어져 양수만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주안산 정상에서 약 20m 정도 내려가면 옛 약사암 자리가 있지만 그 근처에는 샘이 있어 고인물을 익히면 피부병이 나왔다고 한다. 이상의 세 가지 추측이 정확한 위치를 알릴 수는 없지만 만월산 서쪽 밑단에 영풍광산이 들어가기 전까지 좋은 수자원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채광활동으로 수자원이 훼손된 것은 매우 유감이다. 부적 바위 동국여자승람을 보면 원통고견에 대한 일화 중 이런 내용이 나온다. 원통형과 원통형이 되어 이 골짜기가 언덕으로 바뀌다니 9세 골짜기에서 1개 골짜기가 충분하지 않지만 앞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Juansan은 A9 골짜기가 보일 만큼 시야가 있고 정상에 서면 날씨가 좋은 날은 서울 남산과 63빌딩이다. 임진왜란 때, 왜승도 여기에 와서 산을 보고 풍수상의 중요성을 알았는지, 산정 근처의 바위에 산맥을 끓는 부적을 붙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바위를 부적 바위라고 불렀다. 현재, 마을 사람들에게 그 위치를 물었지만, 확실히 위치를 전한 적은 없고, 단지 부적을 붙일 정도의 바위를 알렸는데, 주안산 등산로를 타고 위로 오르면 정상 근처에 인천을 내려다 보는 바위가 있지만, 이 바위는 산 줄기의 맨 아래 속이며, 한다. 이런 이유로 이 바위가 부적 바위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감기 머리 옛날 중국에 가는 사신들은 별이봉을 넘어 문학산의 사모지 고개를 넘어 황해안에 위치한 호랑이대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사신을 보내고 있던 가족, 사랑니가 별리현에서 이별을 나누어 거기서도 헤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미코현(사모지 고개)까지 붙어 멀어져 가는 사신을 크게 3번 불렀다고 하지만, 부평의 별리현이 어딘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벳리현의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해 여지승람, 고지, 한국지명총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지명이다. 다만, 대동녀 지도에 따르면 성현(星峴)이라는 지명을 별개 또는 별누현이라고도 불렀다고 현지에서 몇대째 살아있는지는 어른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별현이라는 명칭은 별별목이라는 것을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별현으로 표기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기서 어른들이 전한 이야기에서는, 이전은 배려장에까지 중국에 가는 배가 들어왔지만, 조선 인조(1642년) 중국 사신이 서울에 특사로서 와, 궁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선 공주와 짝사랑하고 애모의 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 특사가 귀국하는 날이 되어 공주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국법상의 공주를 결혼할 수 없고, 또 미야나카를 나가서 송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특사가 한양에서 새벽에 귀국도를 타고 배려장에서 중국에 가는 배에 탑승했다. 국법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려 별리현까지 특사를 보냈다. 그 후 별리현을 별 고개로 삼고 별고에서 현재 성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만주주 공단지를 이웃 노인은 성현부락이라고 부르고 있다. 소창 옛날에는 농지세를 현물세인 벼나 콩, 잡곡 등으로 징수했지만, 조선 중엽에 인천 남촌면과 조동면의 마을 사람들은 수확 후에 나라에 내는 현물세와 봄부터 렌탈된 장리 벼의 원리를 맞추어 농가당 약 15도씩이 된 벼를. 그런데 길이 좁고 마차가 제대로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현물세를 내려가는 것이 큰 어려웠다. 이에 주민이 조동면에도 창고를 설치해 줄 것을 수차관에 청원을 했지만 잘 안됐다. 그 후, 창고 설치의 허가를 얻었지만, 내용인 즉, 창고는 관에서 행해져 그의 모든 노력은 주민의 부담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집을 닦아내고 배가 출입할 수 있도록 골을 파야 하고 선착장을 만들어야 하는 엄격한 공사를 해야 했다. 농민들은 일년만 고생하면 매년 먼 곳을 오가는 고통이 없어져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해 수확 후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농민들은 이듬해 농업까지 열심히 부역을 하고 기어가 큰 일을 해왔다고 한다. 이렇게 서창이 설치된 후 서창은 한양에 대한 관문으로 크게 번영했다. 당시 전국에는 10곳의 조창이 있어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세곡을 보관하고 아사쿠라에 보관한 세곡은 정부의 수급계획에 따라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전라 충청지방에 보관한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아사쿠라는 용산창과 함께 야적장으로 큰 역할을 했다.
군부 남향 효부남향은 의령남씨로 남진모의 아들이다. 그녀는 1848년(헌종 14년) 12월 초에 태어나 꽃다운 나이 17세 때 남편 송보인과 혼인했다. 그녀의 시가는 인천부 남촌면 발리돈이었다. 그녀의 남편 송보인은 병으로 남자부인과 20살 때 사별했다. 어렸을 때 청산과부가 된 남부인은 늙은 자부모를 모시고 효도를 극단적으로 했다. 가사를 맡아야 했고, 농업일도 여성의 몸으로 벗고 나서 열심히 남편이 있을 때는 그녀의 집이 굉장히 타락했지만, 오히려 재산이 늘었기 때문에 부모와 친척은 그를 찬양했고, 집 생활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 부자였다. 그녀는 또한 친척에게 부드러움을 깊게 했다. 친척 속에 사는 것이 어려웠고, 땅을 파는 집이 있다면 남부인은 자신의 돈으로 그 땅을 도로에 끌어들이고 살게 했다. 그 후 또 한 집안에서 심하게 달려 집을 매매하게 되면 다시 그 집을 사서 도로에 살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시부모에게 매우 봉양했기 때문에 그의 장모는 아내를 자랑하고 칭찬했다. 시부모가 오랫동안 돌아가자 마음을 다해 장례식을 모시고 여성의 몸으로 매일 성묘를 했다.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부모의 혼인을 모시고 수많은 아버지에게 선산묘소를 치산하고 또 묘비를 세워 조부모 친군에게 효성을 다했다. 그녀의 부모는 물론 선조의 친척에게도 효성과 우애가 지극히 20세에 미망인이 되어 정절을 지키면서 가산을 늘려 부유한 생활을 누려 서기 에 타개했다. 그녀가 죽기 전인 , 그 지방의 사람들은 그 효부의 효행과 덕행을 당국에 호소하고 표창을 받게 했다. 효부 남향의 무덤은 수산동 위의 제2경인 고속도로 맞은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무덤의 청결함이 남다라 후손들의 존경과 애정이 아직 식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장사 서명운 음실촌에는 대대로 이천서씨가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백십년 전에 이 서씨 가문에서 장사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기상은 마치 범처럼 굳고 웅장했고, 평범한 사람의 몇 배나 힘이 있었고,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큰 장사를 낳았다는 것을 관청에서 알면 부모님까지도 벌을 내리는 방법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다리의 얼룩을 해치고 절절 깨끗하게 걷게 했다. 그래도 힘은 여전했다. 여기에 그의 힘에 관한 일화가 있었고, 한때의 가신천동은 옛날부터 소 시장에서 유명했지만 어느 날 거기에 있던 황소 두 마리가 싸움이 붙었다. 소를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키은센 그들이 많고 강력한 그들은 모두 한 번씩 소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때 윤문성이라는 근동 석암의 유명한 장사가 나타나 소를 떼려고 하면 모두 기대를 걸어 응시했지만, 그도 용을 여러 번 쓰자 결국 포기했다. 다만 거기에 볼 수 있는 지나친 서장사가 이것을 보고 결국 나와 힘을 쓰면 소들이 단번에 떨어졌고, 그가 절정의 다리에서도 굉장한 힘을 쓰는 것을 보고 그의 돌봐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병신의 몸으로 세계를 원망하고 일생을 보낸 공운의 장사였다.
정각 인천광역시 신청사가 세워진 곳이 정각골이다. 시청소재지 구월동은 원래 이월동이었다. 솔레산의 주응봉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있던 구릉을 이루었지만, 그 형태가 마치 거북이 같다고 귀산이라고 불렸다. 또 이 산이 마치 활처럼 구부러져 반월인 것 같다고 하고, 귀산의 사자와 반월의 월자를 따서 이 마을을 귀월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9월에 잘못 쓰게 되었습니다. 또, 이 산의 언덕이 붉은 진흙이기 때문에, 주원 즉 붉은 언덕이라고 불렸다. 옛날에는 부청, 도청 등을 가리키며 감영이라고 해서 명당을 골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해, 시청사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곳에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마을명의 유래를 알고 나서는 납득이 갔다. 정각골이란 올바른 집, 큰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옛날부터 여기에 시의 감영을 할 수 있는 것을 미리 예고한 이름이라고 한다. 삼각산 리초지 조선시대 인천의 진산인 솔레산의 서쪽 지금의 인천광역시와 시흥시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속은 이름으로 담배라는 마을이 있다. 여기는 지금의 행정구역상에서 남동구 만수동에 속해 조선 중종 때 이후 대대로 전주 이씨가 세거해 온 곳이다. 조선조 말기 고종 때 이곳 전주 이씨가문에서 장사가 태어났지만 태어나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남다른 일이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울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닐까! 10세가 되기 전에 몸집이 어른만이 되면 15세가 되어서는 그를 당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힘이 세어져 주위에서 그를 이장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장사의 부모는 이때부터 큰 공포에 휩싸였다. 이것은 옛날부터 매우 강력한 장사가 태어나자 나라에서는 그들을 두려워 결국 본인뿐만 아니라 그 일족까지 잡아 죽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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